북성로(대구 중구)는 두 얼굴을 가졌다. 낮에는 온갖 공구를 파는 잡화상, 타일점, 보일러 가게 등이 가득한 자재 골목이다가 밤이 되면 흥청이는 술판에 흔들리는 사람들로 채워진다. 북성로 돼지불고기 골목. 오후 8시가 되면 이 곳은 포장마차들로 속속 채워지고, 삼삼오오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밤의 술기운은 지워버리고 아침을 맞이한다. 이제는 흔하디 흔한 돼지불고기, 게다가 유부 몇 조각과 고춧가루를 풀어넣은 소박한 우동이지만 사람들은 북성로에서 그 옛날의 추억을 찾고, 낭만을 발견한다.
△밤에만 피는 꽃
북성로 대구은행을 기점으로 양 옆의 골목, 그리고 거기서 KT&G 방향으로 한 블럭 앞의 골목길은 밤이면 입맛 도는 돼지고기 굽는 냄새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북성로 돼지불고기와 우동은 대구 사람들이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대구의 유명한 대표 먹거리 중 하나다.
상점들이 문을 닫는 오후 7, 8시 쯤이면 포장마차가 몰려나와 진을 치기 시작하고 어둠이 짙게 깔리면 불빛을 보고 달려드는 부나비처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소주잔을 기울이려는 사람들로 가득찬다.
친구들과 소주 한 잔 하기 위해 이곳을 자주 찾는다는 권지현(25`중구 동산동) 씨는 "서늘한 밤바람 맞으며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젖어본 사람이라면 그 맛을 잊지못한다."며 "타지에서 친구들이 찾아오면 꼭 데려오는 곳이 바로 북성로"라고 했다.
십년 전 만 해도 골목길에 자리를 폈지만 이제 일부 포장마차들은 아예 밤새 사용하지 않는 주차장터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반복되는 공무원들과의 무허가 업소 단속을 피하기 위해서다.
유료주차장 터를 사용하고 있는 '원조 북성로 우동`돼지불고기' 집은 북성로에서 가장 규모가 크면서 오래된 집 중 하나다. 김준석(59) 씨는 "북성로에서 술장사를 한지 16년째"라며 "단속이 심해지면서 친구가 운영하던 주차장을 밤새 무료로 빌려쓰고 있다."고 했다. 이 곳의 운영방식은 특이하다. 규모가 워낙 커지면서 인근에서 포장마차를 하던 3명이 공동 사장이 됐고, 사흘마다 돌아가며 장사를 하고 있다. 장비는 공동으로 사용하지만 그날의 수입은 혼자 가지는 방식이라고 했다.
대구은행 주차장을 사용하고 있는 '좋은날'도 마찬가지로 임대료를 내지 않는다. 한달 전 포장마차를 인수한 장윤태(36) 씨는 "형편이 여의치 않은 처지를 이해해 주는 것인지 밤새 장사한 흔적이 남지 않도록 쓰레기 한 점도 남기지 않는 미덕 때문인지 은행 측이 임대료를 요구하지는 않는다."며 "대신 밤새 은행 옆을 지켜주니 도둑이 얼씬거릴 수 없는 장점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 외에도 부산갈매기, 원조 돼지집, 장작불, 준호집, 태능집 등 10여 개의 포장마차가 북성로의 밤을 밝힌다.
이 곳에 돼지불고기를 주 메뉴로 한 포장마차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약 25년 전 쯤으로 사람들은 기억했다. 처음에는 택시기사나 밤업소 종사자들의 주머니를 겨냥했지만, 1982년 야간 통행금지가 풀리고 해방감을 만끽하는 애주가들의 입소문을 타고 번지면서 지금은 대구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명물거리가 됐다.
<명물 거리> 10년 전 그대로 가격...인기 원천
△연탄의 비밀
연탄불 위로 돼지고기가 지글지글 맛있는 소리를 내며 익어간다. 석쇠를 두드리자 빨간 불꽃이 솟아오르며 온 사방에 돼지고기 타는 냄새가 자욱하게 번져가면서 지나가는 이들의 발길을 사로잡는다.
북성로 돼지불고기 맛의 비밀은 바로 연탄. 전국의 식당에서 흔히 사용하는 숯이 아니라 연탄으로 돼지고기를 익힌다는데 바로 맛의 원천이 숨어있는 것이다.
이런 기막힌 아이디어는 유목민처럼 매일 전을 펴고 걷어야 하는 그 태생적 한계 때문에 비롯됐다. 숯불을 계속 당길수 없는 형편이라 생각해 냈던 것이 바로 연탄불. 한번 피워두면 밤새 거뜬히 버틸수 있는 것이다. 하루밤 사용되는 연탄은 4, 5장 내외라고 한다. 막상 연탄을 사용해 보니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돼지고기 특유의 누린내를 연탄에서 나오는 유황냄새가 간단히 제거해 줬기 때문이다.
이 곳 주인들은 손님이 다가서면 반사적으로 석쇠를 두드린다. 이렇게 석쇠를 두드리는데서 경력이 묻어난다. 앞뒤로 뒤집고 몇 번을 두드려가며 재빨리 고기를 익힌 뒤 쇠로 만들어진 접시를 석쇠 사이에 끼우고 둥글게 한번 돌려주면 금세 먹음직스런 돼지불고기가 한 접시 얹혀 나온다.
원조 북성로 우동·돼지불고기 사장 김준석(59) 씨는 "석쇠를 두드리면 붙어있던 기름이 연탄속으로 떨어지며 불꽃이 연출된다."며 "기름기를 제거해 좀 더 담백한 맛을 제공함과 동시에, 볼 거리인 불꽃쇼를 연출하고, 냄새로 지나가는 이들을 유혹하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노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주문된 돼지불고기는 3분 내에 손님의 식탁으로 배달된다. 빠르게 익히기 위해 미리 슬쩍 익혀두기 때문이다. 도자기처럼 초벌구이와 재벌구이를 따로 하는 방식이다. 돼지불고기에 사용되는 돼지고기는 목살과 삼겹살, 다릿살을 적절히 섞은 것.
김 씨는 "손님이 몰리면 정신이 없어 미리 양념된 돼지고기를 한번 익혀둔다."며 "그래야 양념물이 질퍽거리지 않고 맛있게 구워진 돼지불고기를 제공할 수 있다."고 했다.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 그 맛
또 다른 북성로의 주 메뉴는 우동. 기차역에나 가야 맛볼 수 있는 흔히 '가끼우동'이라고 불리는 '가락국수'가 그것이다. 공장에서 가져온 우동을 뜨거운 육수에 한번 담갔다 건져내고 국물을 한 국자 퍼 담은 뒤 유부 몇 조각에 쑥갓, 김, 고추가루가 전부이지만 그 맛은 헛헛한 속을 어루만져 준다. 무, 다시마, 멸치, 파뿌리, 양파 등을 넣어 푹 끓여낸 육수 맛이 일품이기 때문이다. 갖은 양념을 아끼지 않고 넣어 끓이는 것도 중요한 요소이지만 간을 마치맞게 맞추는데 북성로 우동의 참맛이 숨어있다.
가격도 옛날 그대로 유지돼 더욱 부담없다. 이렇게 뚝딱 만들어낸 우동 한그릇의 가격은 2천 원. 돼지불고기 큰 접시는 1만 원, 작은 접시는 5천 원이라는 가격도 10년 전 그대로다.
김 씨는 "예전에 비해 이윤은 좀 줄어들었지만 경제사정이 계속 좋지 않으니 가격을 올릴 수가 없다."며 "서민들이 사랑하는 곳이니만큼 가격도 저렴해야 하지않겠냐."고 반문했다.
지난 추석 연휴는 북성로의 대목이었다. 연휴 앞전에는 오히려 손님이 뜸해지지만 본격적인 연휴가 시작되면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타지인들의 발길이 이곳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변하지 않은 맛과 가격, 그리고 변하지 않는 풍경으로 넉넉한 북성로. 한가위 보름달을 머리위에 두고 술 잔을 기울이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추억과 낭만이 보름달 만큼이나 가득찰 수 있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