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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문화거리 '향촌동'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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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문화거리 '향촌동'

내여자의컨셉 2007. 7. 10. 16:20
 ☆ 잊혀진 문화거리 '향촌동'
1950년대 대구시 향촌동은 '피란문학'의 요람이었다. 번화한 북성로 상점과 관청, 은행이 밀집해 있었기에 이 일대는 일제시대 대구의 유흥중심이었다. 패전한 일본인들이 떠나고 쇠퇴하던 향촌동은 1950년 피란 문인들로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이했다.

전쟁 중이었지만 골목에는 바흐와 베토벤이 물처럼 흘렀고, 문학이 꽃피었다. 묵객들은 외상 술일망정 호기롭게 마셨고, 주인들은 외상인줄 알면서도 술상을 내놓았다. 문인들이 문학과 술에 취해 걷던 향촌동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시인묵객이 떠난 자리에는 오고가는 사람이 드물었고, 남루한 골목에는 후텁지근한 여름공기가 고여 있었다.

향촌동 골목은 좁고 구불구불하다. 50, 60년대 그 좁은 골목을 따라 하코방(단칸 가건물) 같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술집, 다방, 음악 감상실, 식당…. 지금은 남루한 골목이 돼 버렸지만 1950년대 향촌동 골목은 한국최대의 문학거리였다. 6.25 전쟁으로 전국의 문인들이 대구와 부산으로 피란왔고, 향촌동은 피란 문인들의 근거지가 됐다.

당시 문인들이 오고갔던 골목은 70년대 80년대 대학생들이 많이 찾던 '무궁화 백화점'에서 중앙통 방향이 아니라 '무궁화 백화점'에서 북성로 쪽으로 이어지는 좁은 골목들이었다. 이 거리는 1920년대 일본인들이 유흥가로 조성했다. 일본인 상가였던 북성로가 있었고, 관청과 은행이 경상감영 공원 주변에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향촌동의 최대 전성기는 1930년대였다. 당시 골목에는 사미센(일본 악기)소리와 게다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떠난 후 쇠락기미를 보였지만 한국전쟁으로 문인들이 피란 오면서 다시 전성기를 맞았다. 시인 구상이 단골로 묵었던 화월 호텔(현재 판코리아 성인텍), 화가 이중섭이 담배 은박지에 그림을 그리던 백록다방(현재의 비바리), 시인 이효상의 '바다' 출판 기념회가 열렸던 모나미 다방(현재 명성식당)이 있었고, 그 맞은편 북성로 골목 건너에는 음악가 권태호 선생과 그랜드 피아노로 유명했던 음악다실 백조(현재 제비표 페인트 위)와 문학계를 발간한 꽃자리 다방(국제 미공사 옆)이 있었다. 육사의 시, 청포도에서 이름을 따온 청포도 다방(현재 한일 유료주차장 옆, 성미 초밥집)과 소설가 최태응과 화가 이중섭이 묵었던 경복여관(현재 코끼리가 청바지를 입는 이유. 아세아 양행 자리)도 있었다.

피란시절 향촌동을 넉넉하게 만든 사람은 시인 구상이었다. 그는 대구 피란시절 문단의 궂은 일을 도맡아 했다. '구상'이란 이름 두 자면 도원동 유곽을 무상으로 드나들 만큼 명망과 신용을 갖춘 인물이었다. 문인들은 무시로 외상술을 마셨고, 시인 구상이나 정훈국 소속 군인들이 외상값을 갚아 주었다. 당시에 문인들은 외상술을 마시면서도 호기로웠고, 술집 주인들은 외상인 줄 알면서도 술상 내놓기를 꺼리지 않았다.

1950년대 후반 젊은 작가였던 김윤환, 허만한, 윤장근씨 등은 곤도주점과 건너집, 고바우집 등을 무시로 드나들었다. 그들 손에는 종종 책이나 우산이 들려 있었다. 여차하면 마시고 책과 우산을 맡길 요량이었다. 그깟 헌책과 우산으로 술값에 댈 수는 없었지만 아끼는 책과 우산인 만큼 반드시 다시 찾아갈 것이라는 보증수표가 됐다. 당시 술집 주인들과 다방 마담들은 문학을 알고 낭만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1956년이었을 겁니다. 술 한잔 마시려고 향촌동 골목을 걷고 있었는데 '허허허' 하고 호기롭게 웃는 목소리가 술집 대지바(지금의 대화식당)안에서 들리지 뭡니까? 구상 선생이었어요. 얼른 들어가 인사했지요. 구상 선생 눈짓 한번이면 무한정 마실 수 있었거든요."

당시 젊은 문인이었던 윤장근씨는 구상 선생의 허락을 얻은 다음 다시 골목으로 나왔다. 그리고 몰려다니던 젊은 문인들을 모아 대지바로 들어갔다. 그날 그들은 양주를 마셨다고 했다.

화가 이중섭이 담배값 은박지에 못을 눌러 그림을 그리던 백록다방(현재의 비바리)은 경북여고 동기인 정복향, 안윤주 두 인텔리가 마담으로 있었다. 마담들의 빼어난 미모와 지성미는 숱한 문인들을 불러모았다. '음악은 르네상스에서, 차와 대화는 백록에서' 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르네상스(현재의 최미용실·세명식당)는 호남의 갑부 아들 박용찬씨가 피란길에 레코드 한 트럭분을 싣고 내려와 문을 열었던 대구 최초의 클래식 음악감상실이었다. '르네상스'는 피란 문인들의 기항지였다.

화가 이중섭은 굶어죽을 만큼 가난했다. 구상 선생의 주선으로 그의 전시회가 당시 미국 공보원에서 열렸고 원장 맥타가드가 담배 은박지에 그린 그림 한 점을 샀다. 그 그림은 현재 미국 뉴욕 현대 미술관에 전시돼 있다고 한다.

피란기 전성기를 누렸던 향촌동은 문인들이 떠나고 60년대를 지나면서 쇠퇴했다. 70년대 80년대 젊은이들은 무궁화 백화점과 중앙통 쪽으로 옮아갔다. 그들은 향촌동에서 삽겹살에 소주를 마셨고, 김치에 막걸리를 마셨다. 술 마시고 노래하던 그들도 떠났고 현재 향촌동은 60대와 70대들의 공간이 됐다. 먼 인생길을 걸어온 노인들은 경상감영 공원의 그늘에 앉아 휴식하고, 근처에 밀집한 성인텍에서 춤을 춘다.

◇ 그때, 그 자리
* 르네상스=대구 최초의 음악 감상실이었다. 현재의 최미용실`세명식당이 있는 자리이다. 손님이 뜸한 것인지, 문을 닫은 것이지 취재진이 탐방했을 때 가게는 조용했다. 호남 갑부 아들 박용찬씨가 1951년 1.4 후퇴 때 트럭 한 대분의 레코드 판을 싣고 내려와 문을 열었다. 문인들은 르네상스에 앉아 음악을 들었고, 삼삼오오 인근 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막걸리잔을 기울였다. 외신기자들이 '폐허에서 바흐를 듣는다.'고 했던 기적의 공간이었다.

* 대지바=구상 선생이 자주 찾던 술집으로 향촌동에서 몇 안 되는 고급 술집이었다. 당시에 양주를 팔고 여급이 술을 따랐다. 대지바의 마담 최옥수는 상하이 댄서걸 출신으로 구상보다 연하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구상 시인을 '상아'라고 친구처럼 불렀는데 구상 시인은 그저 허허 웃어넘겼다고 한다. 지금의 '대화식당' 자리이다.

* 백록다방=천재 화가 이중섭은 1955년 초 대구로 와 이 다방에 앉아 담배 은박지를 캔버스 삼아 그림을 그렸다. 이중섭 화가는 구상 시인의 권유로 최태응과 함께 경복여관 2층 9호실에 한동안 머물렀다. 이중섭은 정신분열증을 앓았는데, 자신의 그림을 사가는 사람들에게 '멍텅구리, 내 사기에 속았다.'고 비웃기도 했다. 그 해 여름 서울로 돌아가 치료를 받았지만 9월 6일 타계했다. 백록다방과 경복여관은 화가 이중섭의 마지막 예술 공간이었다. 백록다방은 당시 대지바 옆에 자리잡고 있었고 현재 비바리 1층이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작성일: 2007년 07월 05일
원본주소(매일신문 라이프 매일) : http://www.lifemaeil.com/news_view.php?print_no=1244&seq=18982
관련 링크 : 향촌동 살릴길 없는가? _  http://www.lifemaeil.com/news_view.php?print_no=1244&seq=18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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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지금은 향촌동 다녀보면 중년부터 노년까지의 어르신들이 많이 왕래를 하는 곳이다.
왠지 젊은이들하고는 어울리지 않을것 같은 거리라고나 할까.
몇해 사진을 찍으러 다녀 봤었는데 대구에 이런것도 있구나 할정도로 옛 정취가 아직 남아 있는곳이다.
오늘 우연히 라이프매일을 보다가 읽게된 기사..
대구 사람이라면 한번즈음은 봐야 되지 않을까 해서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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